Topic : 이달의 화제
문자 (Letter)
에디터: 김선주, 박중현, 김지영, 박소정
태어난 순간 말은 그저 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이 흐르는 소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소리에 의미가 있음을 파악하고, 문자로 기록하여 남겨 손 닿지 않는 먼 곳까지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우리는 소통하고 나눌 수 있는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됐다. 이번 토픽에서는 문자의 탄생으로 문명을 세워온 역사부터 한글의 탄생과 우수성 그리고 한글을 널리 익히고 쓰일 수 있도록 발전해온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이야기까지 두루 살펴보았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서기의 신 ‘토트’가 인간에게 문자를 주었다고 전한다. 물론 정말로 신이 전해준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문자가 그만큼 인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 문자는 소통의 방식을 바꾸고 사회제도를 변화시켰다. 문자를 통해 경험과 지식을 전달하고, 공유한 지식이 누적되면서 인간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인류의 문명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네 지역은 공교롭게도 모두 문자가 태어난 곳이다. 문자가 발생한 곳에서 문명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
한글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라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로버트 램지 교수는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에 반해 매년 우리나라 한글날에 맞춰 탄생을 축하해왔을 정도이며, 『총, 균, 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국 문화인류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글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 격찬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한글에 관해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을까?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간혹 발견하게 되는 한글에 관한 막연하고도 미묘한 우월감을 건드려보고 싶다. 한글은 분명 여러 면에서 독창적이고 우수한 특질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몸속에 무슨 특별한 언어적 DNA가 흐르는 것도 아닌 이상 무지에 가까운 국수주의적 우월감에 취해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창제 배경과 원리를 역사적 관점에서 정확히 인식해나가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접근이며, 그 우수성을 정확히 인지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한글이 근세인 1400년대에 만들어진 것에 비해 한자나 로마자 등은 기원이 유구할 정도로 오래되었으며, 그 생성 역시 인류의 발전사에 따라 자연 발생적이다. 학문(學問)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시기에 기록성과 대중성을 갖춘 것만으로도 모든 문자는 제각기 신비롭다. 우리나라 역시 말인 한국어와는 별개로 오랜 시간 한자를 글로 사용해왔기도 하고, 시간과 문명 발달의 간극을 무시한 채 한글을 타 글자와 단순비교하는 것은 전제에 무리가 있다. 또한 한글은 국가적 엘리트 집단인 왕족과 관리, 학자들의 뚜렷한 설계 아래 창제된 문자다. 그래서 한글은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문자 중 가장 근래에, 전문적으로 만들어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근대 이전, 그것도 불과 한 왕의 대라는 짧은 시간에 과학적 체계를 지닌 문자를 만들어낸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일이다. 또한 국가적 인력이 동원되어 설계했다는 점은 사실 칭송할 만하면 했지 흠이 되는 일이 아니다.